세기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인생 연대기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작품 2편을 만나보자.
♡
파블로 피카소 1881~1973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독보적인 거장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미술계에서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예술가로 큐비즘 이론과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1881년 10월 25일에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을 다루고 있으며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는 그의 대표작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에 사망하였다.
피카소의 인생 연대기
- 1881 10월 25일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호세 루이즈 블라스코와 마리아 피카소 로페즈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화가이면서 미술학교 교사, 어머니는 안달루시아 지방 출신이었다.
- 1894 자기가 쓴 일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아버지가 어린 피카소의 재능에 감탄하여 이후부터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들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한다. 미술교사인 아버지로부터 화구 일체를 물려받는다.
- 1896 바르셀로나에 첫 작업실을 연다. 바르셀로나 미술산업전시회에 <첫 영성체>가 전시된다.
- 1897 16세에 <과학과 자비>로 전시회에서 특선을 받고 마드리드 로얄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6월에 학교를 자퇴한 후 카페, 사창가 등을 배회하며 그곳의 생활을 그리는데 열중하였다. 피카소는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찾는다.
- 1899 카탈루냐 지방에서 1년간 휴양한 후 다시 돌아온 그는 미술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선술집 Els Quatre Cats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만난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될 시인 시바르테스와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을 만나게 되며 신문삽화를 그리게 된다.
- 1900 '네 마리 고양이' 선술집에서 150점 가량의 데생을 전한다. 그는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처음으로 파리여행을 떠난다. 이를 통해 피카소는 색채의 발견이란 성과를 얻었으며 세잔느, 톨루즈 로트렉, 드가, 보나르 등의 작품을 접한다.
- 1901 절친한 친구가 파리에서 자살로 떠나고 피카소는 마드리드에서 <젊은 예술>이란 미술잡지의 공동 편집인이 된다. 5월 바르셀로나의 개인전 이후 파리를 다시 방문한다. 그는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개막 전에 15점을 팔고, 파리생활을 모티브로 한 작품 외에 가난과 노년 고독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 1903 바르셀로나로 귀환한 그는 14개월 동안 <삶>을 포함해 50점이 넘는 그림을 그린다. 짙은 청색으로 육체가 노쇠해 가는 과정과 불구를 표현, 이때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는다.
- 1905 파리로 영구 이주한 피카소는 <곡예사 가족>을 포함하여 서커스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작한다. 청색시대가 끝나고 장미 시대가 시작된다.
- 1906 화상이 다수 그림을 사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스페인 고졸로 여행을 떠났는데 여기서 앙드레 드랭을 만난다. 그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 1907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매료된 그는 무수한 습작과 변형 끝에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7월에 완성한다. 칸바일러가 피카소의 유일한 화상이 되고, 입체주의를 함께 시작한 조르주 브라크를 만난다.
- 1908 조르주 브라크와 세잔느의 그림을 연구, 그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입체주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한다. 브라크가 칸바일러 화랑에서 그의 첫 큐비즘 회화인 에스타크 작품들을 전시한다.
- 1909 조르주 브라크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탁자에 놓인 빵과 과일그릇>을 그리면서 분석적 입체주의 작품이 시작한다. 다시 스페인 여행을 통해 끌리쉬 거리에 아틀리에를 마련한다.
- 1911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갖고, 최초로 활자체를 회화구성에 도입한다.
- 1914 6월 아비뇽에서 브라크와 드랭을 만나,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반발하자 입체주의의 추구와 함께 고전적 데생을 활용한 작품을 제작한다. 3년 계약을 맺은 칸바일러가 이탈리아로 떠났고, 그의 화랑이 압류당하면서 작품이 어두운 색채를 띄게 된다.
- 1916 취리히에서 다다 운동이 시작되고, 장 콕토의 소개로 러시아 발레단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작곡가 사티를 만난다. 발레극 <퍼레이드>의 무대 디자인을 맡게 된다.
- 1917 <퍼레이드>의 무대 장치와 의상을 구상하기 위해 장 콕토와 로마 여행을 한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퍼레이드>를 초연하나, 그의 무대작품은 프랑스 문화를 위태롭게 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는다.
- 1918 세 번째 여인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한 피카소는 1921년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나면서 지중해주의 정신이 깃든 면, 형태, 색채를 뚜렷이 표현, 입체주의 그림들에 고전적 표현을 부여한다.
- 1924 초현실주의자들이 대거 함여한 <피카소에 대한 경의의 글>이 파리 신문에 발표되면서 장식적인 큐비즘 풍의 대형 정물을 그린다.
- 1928 1914년 이후 처음으로 조각을 다시 시작하면서 파리의 홀리오 곤잘레스 작업실에서 철과 금속판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신화 미노타우로스 주제가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 1929 살바도르 달리를 만난다. 부부관계의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는 공격적 성향의 여성 얼굴을 연작으로 그린다.
- 1932 파리와 취리히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며, 크리스티앙 제르보가 피카소 카탈로그 첫 권을 출간한다.
- 1935 6월 올가와 결별하며 재산 분할 등의 문제로 가장 힘든 시기를 맞는다. 피카소의 최고의 모델인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딸 마야가 출생, 사실상 회화를 포기한 채로 글쓰기에 매달린다.
- 1936 작가 폴 엘뤼아르를 만나 오랜 우정이 시작되며, 피카소의 시들이 <예술 노트>에 기재된다. 뉴욕현대미술관 전시 <큐비즘과 출상미술>에서 1907년부터 1929년 사이의 작품 32점 포함 전시, 스페인 순회 전시회를 갖는다. 7월 18일 스페인 내전 중, 피카소는 프랑코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공화파의 보답으로 프라도 미술관장으로 임명된다.
- 1937 도라 마르의 도움으로 그랑 오귀스탱 거리에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한다. 그녀로부터 그림의 영감을 얻고 파시시트를 고발하는 <게르니카>를 제작,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서 <게르니카>를 전시한다. 뉴욕근대미술관이 <아비뇽의 처녀들>을 구입한다.
- 1943 초현실주의 희곡 <꼬리에 잡힌 욕망>을 집필하기도 한 피카소는 아상블라주 <황소머리>를 제작한다.
- 1944 알베르 카뮈, 시몬느 드 보브와르, 장 폴 사르트르, 레몽 크노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꼬리에 잡힌 욕망>을 낭독한다. 파리가 해방된 후 공산당 입당, 처음으로 가을 살롱전에서 지난 5년 동안 제작한 회화, 조각들 74점을 출품하지만 혹독한 비평을 받는다.
- 1945 5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 <게르니카>와 짝을 이루는 <시체안치소>를 그린다. 앙리 마티스와 런던과 브뤼셀에서 전시를 갖은 후 파리의 페르낭무를로 작업실에서 석판화에 몰두한다.
- 1946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회고전 개최, 피카소의 허락을 얻어 앙티브 미술관에서 4개월 동안 작업하고, 그의 작품들은 기증된다. 앙티브 미술관을 피카소 미술관으로 개칭된다.
- 1947 무를로 작업실에서 석판화 작업, 그림 10점을 파리근대미술관에 기증한다. 공예가의 마두라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도예를 시작하여 이듬해 약 2000점의 도예작품을 제작하는데 도자기들에서 고전적이니 전통 및 자신의 지중해 혈통과 동일시하려는 피카소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 1950 쿠르베의 원작을 모사, <염소>와 <유모차를 끄는 여인>을 재활용하여 청동작품을 제작한다. 서필드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서 레닌 평화상을 수상, 발로리스 명예시민이 된다.
- 1951 일본 도쿄에서 회고전 개최,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면서 한국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다.
- 1954 들라크루아의 <일제의 여인들> 변형 작업을 시작한다. 피카소는 말년에 미술사에서 주제를 구했고,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변형하는 욕망이 컸다.
- 1955 파리에서 피카소 공식 회고전을 개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영화 <피카소의 신비>에 유일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 1958 파리에 신축하는 유네스코 건물 벽화 <이카로스의 추락>을 완성하다. 엑상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보브나르그 성을 매입, 51년~61년까지 부정기적으로 작업한다.
- 1962 레닌평화상을 두 번째로 수상하며, 자클린느를 소재로 한 유화, 데생, 판화, 도자기 등을 70여 점 제작한다. 파리 발레단 공연을 위한 무대의 커튼에 그림을 그린다.
- 1963 자클린느 초상화를 연작, 바르셀로나에 피카소 미술관 개관한다.
- 1967 그랑 오귀스탱 거리의 작업실에서 쫓겨나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다.
- 1968 오랜 친구이자 비서였던 시바르테스 사망, 그를 기리며 청색 시기에 그렸던 작품을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에 기증한다. 7개월 동안 327점의 에칭 작품을 제작한다.
- 1970 아비뇽 교황청에서 피카소 작품을 전시한다.
- 1972 자화상 데생 연작, 뉴욕근대미술관에 1928년작 <철사로 만든 입체조형>을 기증한다.
- 1973 4월 8일 프랑스 무젱에서 사망하여 10일 보브나르그 성의 정원에 묻힌다.
피카소의 대표작
■ 아비뇽의 처녀들 :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1907년에 그림 그려졌으며, 큐비즘 예술의 선구자로서 피카소의 예술적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의 신체를 심하게 왜곡시키고 얼굴을 가면처럼 그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이것은 피카소의 동반 예술가인 조지 브라크와 함께 그린 작품으로, 파리의 모흐 동반 작업실에 탄생했다. 이 작품은 기독교적인 주제인 아비뇽의 성모 마리아를 다루고 있으며, 여러 개의 관절이 있는 물건들과 어떤 형상을 대체하는 다른 요소들을 통해 형태를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큐비즘의 특징을 보여준다.
■ 게르니카 : 피카소의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1937년에 그려졌으며, 스페인 내전 중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격으로 파괴된 스페인의 바스크 마을에서 제목을 딴 게르니카를 주제로 그렸다. 그림 전체가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폭격으로 인한 혼돈과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한 색조를 선택했다. 작품에서는 인간과 동물, 건물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고통과 혼란의 상황을 나타내는 다양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비참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게르니카의 폭력과 고통을 상징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비극적인 분위기를 잘 살렸으며 비틀린 인체, 울부짖는 사람과 동물, 붕괴된 건물 등을 통해 폭격의 참상과 인간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업적과 동시에 인류 역사상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 : 분석적 입체주의란?: 통일된 원근법 대신, 형태가 입체 기하학적 다면체 구조로 분할되는 방식의 화풍
댓글